칼럼 도산을 본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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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이 도산 안창호의 서거 80주년이었습니다. 도산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던 1948년 3월 10일 명동에 있던 시공관(후에 국립극장)에서 10주기 추모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때 21살의 대학생이었던 내가 그 모임에 참석하였었는데 어느덧 70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제 추모식에 모인 사람들이 내 나이를 알면 나를 태고의 사람으로 여길 것이 분명합니다.
추모식 전날 나는 도산 공원 안에 있는 도산 기념관에서 한 시간 동안 강연을 하였는데 70년 전 그 추모식에 대학생으로 참석했던 내가 기념 강연을 하게 된 사실이 대단히 감개무량하였습니다. 70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간 것을 모르고 이날까지 살아 온 듯합니다.
도산은 일제하에 대전 감옥에 투옥되어 일본인에게 시달리다가 위병을 얻어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이듬해에 서울에서 별세 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60년의 삶밖에 살지는 못했지만 그의 인격과 교훈의 힘은 앞으로도 600년을 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도산이 미국에서 흥사단을 만든 까닭은 민족성을 개조하지 않고는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개개인의 인격 도야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때가 되면 그렇게 준비된 인물들을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로 내세울 생각이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산 서거 후 80년이 지났어도 도산의 제자들 중에 나라를 바로 잡으려고 나서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적이 없으니 그들은 단지 흥사단을 수양 단체라고만 생각한 듯합니다. 그것은 결코 도산의 참뜻은 아니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자유 대한이 되어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위대한 시대가 도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흥사단은 단 한사람의 대통령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해방 뒤에 흥사단이 차지했던 을지로 입구에 대성빌딩은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민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흥사단은 그 건물을 처분하고 어디엔가 공원묘지를 마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서울 대학로에 조그만 건물 하나를 남겼을 뿐입니다. 도산공원은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마련하였다지만, 그곳에 설립된 도산 기념관은 그 규모가 하도 초라하여 도산 안창호를 기념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교훈인 “무실역행”의 제창자로 민족의 등불이었던 도산의 정신이 이렇게 위축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길 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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