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6.25와 임진왜란은 준비 없이 당한 침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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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임진왜란의 공통점은 주변국과 상대국에 대한 정보가 없었고 그에 따라 대비가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1589년 11월 18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자, 14대 선조대왕은 일본의 사정을 비밀탐지하려고,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작정하였다. 정사에 황윤길(서인), 부사에 김성일(동인), 그리고 서장관에 허성(동인)을 임명하였다.
1591년 3월 서울에 돌아와 선조에게 보고한 일본정탐 내용은 정사와 부사가 전연 반대였다.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듯하다. 항구마다 배들이 많이 정박하였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것들이 모두 어선같이 보이지 않으며 히데요시의 눈은 광채가 있고 담략이 남달라 보였다고 보고 했지만 부사 김성일은 히데요시의 얼굴은 원숭이 같고 눈은 쥐와 같았으며 생김새도 변변치 못하니 두려울 것이 못된다고 보고했다. 선조는 두 사람의 보고가 다르자 서장관 허성에게 물었다. 그는 서인 황윤길의 편에 서서 사실대로 답변을 하였다. 이후 동인이었든 허성은 동인들의 미움을 사서 곤혹을 치렀다. 그 이듬해 1592년 4월 13일, 15만 명의 일본군은 700척의 병선을 몰고 부산앞 바다에 나타났다. 선조는 허겁지겁 비가 쏟아지는 한 밤중에 백성들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한 대의 탱크도 없었는데 허풍
6.25전쟁 개전 당시의 전력을 보면 개전 초기는 ‘전쟁’이 아니다. 미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6.25는 일방적인 ‘침략’이었다.
당시 전력은 한국군 병력은 북한의 정반이었고 북한이 242대의 탱크를 보유했지만 한국군에는 한 대의 탱크도 없었다. 야포의 경우 북한은 728문 이었지만 한국군은 91문 항공기의 경우 북한은 211대인 반면 한국군은 정찰기 22대 뿐이었다. 더욱이 북한군은 중국 팔로군 출신으로 참전 경험이 있는 자들이 있었던 반면 한국군은 전투참여 경험이 전무하고 문명이 다수였고 대부분 신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참모총장인 채병덕은 “전쟁이 일어나면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자신만만했다.
채병덕은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가 "극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고, 막상 전쟁이 터지자 누가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작전 지휘를 연발했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피난가야만 했다.
임진왜란이나 6.25는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지 않은 벼슬아치들의 당파싸움이나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했던 고위직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모든 피해는 전적으로 국민들에게 돌아갔다.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비무환의 국가안보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되지도 못한 가설이나 괴설로 국가안위를 무시하는 정치인들부터 제거해야 대한민국이 살 수 있다. 6.25 65주년이 되었다. 6.25 때에 소를 잃었다면 외양간이라도 고쳐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다시는 소를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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