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특집 세월호의 참사 하양에서도 있었다
페이지 정보
본문
세월호의 참사 하양에서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로 어린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과 자기의 권력을 잘못 사용해 전 국민의 세월을 멈추게 했다. 유족들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고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영혼들을 어떻게 사죄할 수 있을까?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어른들,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한 공직자들은, 유족들에게 사죄해야 하며 유명을 달리한 영혼들에게 속죄해야 한다.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냈던 세월호와 같은 비극이 임진년 하양에서도 있었다.
징비록에 나타난 동족 죽인 참극
조선왕조실록이란 세계 유례가 없는 역사실록을 기록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서애 유성룡 선생은, 조선시대 참담했던 임진왜란의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이란 교훈서를 남겼다.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은 조선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으로 수많은 고초를 겪은 참담함을 잊지 않고 똑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후손에게 교훈을 주고자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1970년 한학자이며 시인인 남만성선생의 역저 징비록 296쪽에 나오는 내용을 해석하면
“ 용궁(龍宮)의 현감(縣監) 우복룡(禹伏龍 )은 그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兵營)으로 가는 길에 영천(永川) 길가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하양(河陽) 군사 수백 명이 방어사(防禦使)에 예속되어 상도(上道)를 향해 그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복룡이 그 군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그들이 반란한다고 트집을 잡아 꾸짖으니 하양군사가 병사(兵使)의 공문(公文)을 꺼내 보이고 자신들을 변호하려고 하는데, 복룡이 자기 군사들에게 눈짓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모두 처 죽이니 그 시체가 들에 가득 쌓였다.
순찰사는 이와 같은 복룡의 행위를 공로를 세웠다고 임금께 보고하여 복룡은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정희적을 대신하여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었다.
뒷날, 하양군사들의 가족인 고아와 과부들이 사신들을 만날 때마다 말머리를 막고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이 때 복룡의 명성이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들의 원통함을 말해주는 자가 없었다소 한다“
대동야승(大東野乘) 권 26 난중잡록(亂中雜錄) 1 임진년 4월 21일자 내용을 보면
“ 우복룡의 그와 같은 행위에 대해 흉악한 왜적에게는 의기를 떨치지 못한 채 도리어 무고한 백성들에게 독수(毒手)를 쓰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공을 요구했으니 그런 못된 꼴이 있을 수 있는가고 반문하며 개탄해 마지 않았다.”
권 35에 보면,
“이 사건으로 하양의 군민들은 전쟁다운 전쟁 한 번 치러보지도 못한 채 고을은 완전히 탕진해 버리고 말았다. 반면 우복룡은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안동부사에 임명되었다. 뒤에 하양의 고아들과 과부들이 조정의 사신이 지나가는 행차를 만날 때마다 말 앞을 막아서서 원통함을 호소했으나 우복룡이 당시 명망이 있다는 이유로 그 억울함을 알고 들어 주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경산에는 이외에도 또 다른 억울한 죽음이 있다.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으로도 불리는 경산 안경공장 학살사건은 한국 전쟁 기간 중에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보도연맹 회원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주민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1950년 7월 20일 경부터 9월 20일 경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다.
경북 경산시 평산동에 위치한 코발트 광산에는 수평 갱도와 수직 갱도가 있어 이곳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그 뿐 아니라, 인근 대원골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건의 피해자는 크게 대구형무소 및 부산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의 두 부류로 나뉜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양민학살 특위의 조사에 따르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1402명이 7월에 학살되었다고 한다. 또,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기록된 1404명 중 1172명의 명단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명단에 나오지 않아 이 사람들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당시, 경산, 청도, 영천, 창녕, 밀양 등의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한국전쟁 직후 검속되었고, 이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부 추산 2,000여 명, 유가족 추산 3,500여 명의 피해자 유족들에 따르면 대부분 좌익 사상이나 반공 활동과는 무관한 단순부역자나 농민이었다.
그나마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은,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해 과거사위원회가 설치되고, 정부 주도로 유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2009년 과거사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은 군경에 의한 학살이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우복룡에 의해 억울하게 동족의 손에 죽은 500여 명의 원혼, 구국의 일념으로 뭉쳤으나 그 뜻을 펴지도 못한 체 개인의 사리사욕의 희생양이 되고 역적의 누명까지 쓰고 아직까지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
이들에게 씌여진 억울한 역적의 누명이라도 벗겨주어 그 한을 풀어주는 것이 현재 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이자 그들을 위로하는 작은 정성이 아닐까?
자료제보: 이재락 하양읍 동서 2리
편집부정리
- 이전글세월호 때문에 세월이 멈추어서는 안 된다. 14.05.17
- 다음글나만 살겠다는 어른들은 부끄러움도 모른다 14.04.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